2008년 06월 13일
패션 오브 노무현
미국에선 멜 깁슨 감독의 신작 <아포칼립토>가 개봉했다. 영화의 형식을 뒤집어쓴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강요라는 평이 간혹 있긴 하지만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뛰어난 경지의 오락영화라는데는 평단과 관객 모두가 동의하며 영화는 순조롭게 흥행하고 있다. 멜 깁슨이 처음에 감독을 한다고 했을땐 반신반의 했었다. 어떤 체계안에서 고수의 경지가 되려면 적어도 십년 이상은 그 일을 꾸준히 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배우를 하다가 감독을 하는 멜 깁슨의 의도는 심심풀이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영화 <브레이브 하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고 나의 고정관념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감독을 하기 위해 태어난 배우. 그가 멜 깁슨이었다. 지금의 영향력있는 감독으로 있게 해준 영화는 물론, 몇년전 숱한 화제를 몰고 왔었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아닐까 싶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내용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제목 그대로 '예수의 고난'을 유혈이 낭자하게, 당시의 현실을 완벽하게 고증하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수는 많이 맞았고, (아니, 거의 죽을정도로 맞았고) 대중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인물이었다. 바리새인들의 분노를 일으킬 뿐만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선동에 홀딱 넘어가버린 청중들의 분노마저도 사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며 그가 받는 고통들이 바로 영화의 내용이었다. 예수의 설교를 쫓아다니며 듣던 대중들은 이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라며 화를 내고, 크게 소리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 대중들의 일관되지 못한 반응을 목격한 빌라도는 당황할수밖에 없었고.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제목에서 느껴지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사람은 알것이다. 그렇다. 나는 감히, 신성모독이라는 죄과를 뒤집어쓰면서까지 노무현과 예수를 비교하고 싶어서 이 글을 시작한 것이다. 노무현의 고난. 그것이 노무현 4년동안의 정권을 한 단어로 압축할수 있는 말이 될수 있지 않을까.
노무현은 예수처럼 설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도 많은 대중들 앞에서. 그래서 그는 대선때도, 며칠전 평일 저녁 시청률에 지각변동을 가져 온 신년 연설에서도, 그는 말을 하기를 좋아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적음을 한탄하며 1시간은 너무 짧고 10시간정도 식사도 하면서 설교하기를 원했고, 급기야는 준비된 원고를 인터넷에 올려버렸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당시 하루 꼬박 넓다란 평원에서 수만명의 청중들 앞에서 설교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노무현은 쉬지않고 설교했고, 말했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와 동일하게 자신의 말로 인하여 비난을 받았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허물고 삼일만에 다시 지으리라는 설교 말씀을 가지고 태클을 걸었던 것처럼, 주류 언론들은 노무현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그 말의 어폐와 오류를 지적해댔다.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바리새인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마음에 찔려 오히려 맹렬하게 예수를 비난했던 것처럼, 주류 언론들은 노무현의 말을 듣고 스스로 마음에 찔려 노무현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가지고 정부를 가지고 놀기에 이르렀고, 이에 노무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욕을 해댔던 것처럼 언론을 불량상품이라고 부르고, 기자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서" 기사를 조작하고 담합한다는 극언을 쏟아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노무현의 요사이 연설 동영상을 차례로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마치 독을 쏟아내는 그릇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중재자가 되었다. 경기가 안 풀린다며 한 택시기사는 '이게 다 씨발 노무현 새끼 때문이야.'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게 만들었고, 집값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자 아직도 내집장만의 꿈을 가지고 있던 한 삼십대 가장은 '염병할 노무현. 집값은 안 잡고.' 라는 욕을 자연스럽게 하도록 만들었다. 신년 연설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에 이젠 대권이라는 말은 없어졌다고 봐도 될 정도로 대통령의 권위는 심각하게 실추되었다. 그러나 가장 최고권위자가 스스로 낮아져 독을 쏟아내는 그릇으로 되고나니 대한민국은 조금은 평화로워졌다고 느껴진다. 상대방에게 돌려질 욕을 대통령에게 해버리고, 상대방이 져야할 책임을 대통령에게 지우며, 노무현은 그것들을 자신의 십자가로 여기고 지고 가버리니 분쟁은 적어지고 그 스스로 피스메이커가 되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아마 임기가 끝날까지도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임기 끝나는 날이 바로 그가 십자가에 달리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그 전까지는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채찍에 맞아 살점이 뜯기고, 피를 흘리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목인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여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된다. 더이상 대통령도 뭣도 아닌 과거의 인물이 되느냐, 혹은 재평가되어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느냐는 바로 노무현이 부활을 하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삼일만에 부활하여 흩어진 제자들을 모으고 성령을 그들에게 선물하여 성도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생전에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라는 행악자를 회심시켜 수권의 신약성경을 쓸 정도의 위대한 제자로 만든 강력한 힘을 지닌 기독교가 생겨난 것처럼, 노무현의 임기가 끝나는 날 그가 부활하느냐, 마느냐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의 패션(passion). 수난인지, 열정인지 아직은 확인 불가한 노무현의 패션에 집중하여 그를 바라봐야하지 않을까.
미국에선 멜 깁슨 감독의 신작 <아포칼립토>가 개봉했다. 영화의 형식을 뒤집어쓴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강요라는 평이 간혹 있긴 하지만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뛰어난 경지의 오락영화라는데는 평단과 관객 모두가 동의하며 영화는 순조롭게 흥행하고 있다. 멜 깁슨이 처음에 감독을 한다고 했을땐 반신반의 했었다. 어떤 체계안에서 고수의 경지가 되려면 적어도 십년 이상은 그 일을 꾸준히 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배우를 하다가 감독을 하는 멜 깁슨의 의도는 심심풀이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영화 <브레이브 하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고 나의 고정관념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감독을 하기 위해 태어난 배우. 그가 멜 깁슨이었다. 지금의 영향력있는 감독으로 있게 해준 영화는 물론, 몇년전 숱한 화제를 몰고 왔었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아닐까 싶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내용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제목 그대로 '예수의 고난'을 유혈이 낭자하게, 당시의 현실을 완벽하게 고증하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수는 많이 맞았고, (아니, 거의 죽을정도로 맞았고) 대중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인물이었다. 바리새인들의 분노를 일으킬 뿐만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선동에 홀딱 넘어가버린 청중들의 분노마저도 사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며 그가 받는 고통들이 바로 영화의 내용이었다. 예수의 설교를 쫓아다니며 듣던 대중들은 이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라며 화를 내고, 크게 소리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 대중들의 일관되지 못한 반응을 목격한 빌라도는 당황할수밖에 없었고.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제목에서 느껴지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사람은 알것이다. 그렇다. 나는 감히, 신성모독이라는 죄과를 뒤집어쓰면서까지 노무현과 예수를 비교하고 싶어서 이 글을 시작한 것이다. 노무현의 고난. 그것이 노무현 4년동안의 정권을 한 단어로 압축할수 있는 말이 될수 있지 않을까.
노무현은 예수처럼 설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도 많은 대중들 앞에서. 그래서 그는 대선때도, 며칠전 평일 저녁 시청률에 지각변동을 가져 온 신년 연설에서도, 그는 말을 하기를 좋아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적음을 한탄하며 1시간은 너무 짧고 10시간정도 식사도 하면서 설교하기를 원했고, 급기야는 준비된 원고를 인터넷에 올려버렸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당시 하루 꼬박 넓다란 평원에서 수만명의 청중들 앞에서 설교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노무현은 쉬지않고 설교했고, 말했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와 동일하게 자신의 말로 인하여 비난을 받았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허물고 삼일만에 다시 지으리라는 설교 말씀을 가지고 태클을 걸었던 것처럼, 주류 언론들은 노무현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그 말의 어폐와 오류를 지적해댔다.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바리새인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마음에 찔려 오히려 맹렬하게 예수를 비난했던 것처럼, 주류 언론들은 노무현의 말을 듣고 스스로 마음에 찔려 노무현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가지고 정부를 가지고 놀기에 이르렀고, 이에 노무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욕을 해댔던 것처럼 언론을 불량상품이라고 부르고, 기자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서" 기사를 조작하고 담합한다는 극언을 쏟아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노무현의 요사이 연설 동영상을 차례로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마치 독을 쏟아내는 그릇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중재자가 되었다. 경기가 안 풀린다며 한 택시기사는 '이게 다 씨발 노무현 새끼 때문이야.'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게 만들었고, 집값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자 아직도 내집장만의 꿈을 가지고 있던 한 삼십대 가장은 '염병할 노무현. 집값은 안 잡고.' 라는 욕을 자연스럽게 하도록 만들었다. 신년 연설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에 이젠 대권이라는 말은 없어졌다고 봐도 될 정도로 대통령의 권위는 심각하게 실추되었다. 그러나 가장 최고권위자가 스스로 낮아져 독을 쏟아내는 그릇으로 되고나니 대한민국은 조금은 평화로워졌다고 느껴진다. 상대방에게 돌려질 욕을 대통령에게 해버리고, 상대방이 져야할 책임을 대통령에게 지우며, 노무현은 그것들을 자신의 십자가로 여기고 지고 가버리니 분쟁은 적어지고 그 스스로 피스메이커가 되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아마 임기가 끝날까지도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임기 끝나는 날이 바로 그가 십자가에 달리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그 전까지는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채찍에 맞아 살점이 뜯기고, 피를 흘리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목인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여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된다. 더이상 대통령도 뭣도 아닌 과거의 인물이 되느냐, 혹은 재평가되어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느냐는 바로 노무현이 부활을 하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삼일만에 부활하여 흩어진 제자들을 모으고 성령을 그들에게 선물하여 성도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생전에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라는 행악자를 회심시켜 수권의 신약성경을 쓸 정도의 위대한 제자로 만든 강력한 힘을 지닌 기독교가 생겨난 것처럼, 노무현의 임기가 끝나는 날 그가 부활하느냐, 마느냐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의 패션(passion). 수난인지, 열정인지 아직은 확인 불가한 노무현의 패션에 집중하여 그를 바라봐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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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6/13 01:26 | 늘어제가부끄러운오늘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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