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 07일
심리테스트 하나 : 경계허물기
영화 <식스틴 블럭>에도 나왔던, 그래서 이제 왠만한 사람들은 전부 답을 알고있는 그 심리테스트 하나 해보도록 하자.
[질문]
당신이 2인승 차를 몰고 컴컴한 어둠이 내린 고향의 산길을 가던 중이었다. 흔한 가로등 빛조차 닿지 않는 아주 어둡고 깊은 그런 시골길이었다. 길을 가던 중 저 멀리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할머니와 고향친구와 이상형의 여인.
세 명이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버스는 이미 끊겼고 할머니는 아까부터 어디가 아프신지 계속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고향친구는 마을에 급한 업무가 있다며 얼굴 아는 사이는 자기밖에 없으니 자기를 태워달라고 했고, 아름다운 여인은 지금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만큼 포기할수 없는 이상형에 가까운, 운명과도 같은 여자였다.
여기서 질문. 당신은 당신의 2인승 차에 과연 누구를 태울 것인가?
1) 할머니를 태우고 응급실로 달려간 당신. 사회적 정의나 인정을 우선시하는 사람으로서 개인간의 관계보다 사회 정의 실현에 앞장서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볼수 있겠다.
2) 고향 친구를 태우고 간 당신. 개인적 의리를 중요시 하는 사람으로서 주변에 친구는 많지만 줏대없다는 소리를 가끔 들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가 부르면 곧 달려가는 당신이야 말로 개인적 인정이 넘쳐나는 진정한 휴머니스트.
3) 아름다운 여자를 데리고 떠난 당신. 사랑 우선 주의의 달콤한 로맨티스트. 하지만 여자한테 패가망신할수 있으니 인생을 올인하지 말길.
뭐, 이런 류의 답이 있겠지.
당신은 1번이든, 2번이든, 3번이든 누구를 선택하건, 그에 합당한 이유를 대며 선택하지 못한 길-기회비용-에 대한 변명을, 알리바이를 열심히 생산해내야 할것이다. 정당방위든, 명분이든, 개인적인 소신이든 간에 그것은 선택하지 못한 길.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변명을 위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변명이라 하더라도, 좋은 변명으로 구축된 좋은 선택이라 하더라도, 선택하지 못한 길이 결국 옳은 길임을 알았을 때 당시에 최선이라고 여겼던 선택조차도 뒤집어져버린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라는 질문이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독백이나.
공부냐? 노느냐? 라는 고민같은 것들.
아니, 꼭 굳이 그것들 중에서 선택을 해야하냐는 말이다. 분명히 나는 엄마도 좋고 아빠도 좋은데. 죽으면서도 사는 방법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법인데. 공부를 하면서도 독서를 할수있는 방법이 충분히 존재하는 데도. 우리는 항상 현실의 선택을 하려고만 한다. 무너진 하늘의 구멍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채.
고등학교 2학년 당시 이 질문을 했던 한 친구는 나의 대답을 원했다. 그러나 나는 한가지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누이좋고 매부좋다는 말처럼 세가지를 모두 만족시킬만한 무너진 하늘의 구멍을 원했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한 끝에 이런 대답을 했었다.
'굳이 그 셋중에 한명을 선택하기보다는 차를 고향친구에게 주고 할머니를 태워서 병원으로 가라고 하면 되잖아. 그러면 고향친구는 급한 약속을 해결할수도 있고, 할머니는 응급상황에서 벗어날수도 있는거고. 나는 남아서 이상형의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분을 쌓아가고.'
어떤 한 진영에 선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확고한 자아 정체성을 가질수도 있고, 그 진영에서 오랫동안 명분을 쌓아온 사람들의 주장을 토대 삼아, 온갖 반론과 논쟁을 이겨온 역사를 가진 오래된 근거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수도 있다. 또한 그렇게 자기만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멋져보이는 일이기도 하고, 유행에 민감한 세상에서 고집스럽지만 당당한 자신을 내세울수도 있다.
그러나 둘중에, 혹은 몇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꼭 그 자판기와도 같은 선택지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할까? 그게 사실은 강요된 강박관념이었다면 어떨까? 우리는 입시세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선택지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당해왔고, 세뇌당해왔다.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분명히 답은 존재했고, 오답 역시 존재했었고, 우리가 곧 경험할 세상 또한 무수한 선택지중에 하나의 답이 있을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경계가 불분명했고, 불분명한 경계속에 간신히 분류의 근거경계를 찾을라치면 다른 선이 있을 거라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가 얇아져 자신이 찾아낸 선을 포기하기도 했다. 무수한 선택지에 답은 없었고, 근거가 풍부한 것들이 답이 되는 세상이요, 다수가 택한 선택지가 답이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있었다.
하지만 사지선다형의 답안지에서 1번답과 3번답을 섞어서 만든 제 5의 답이 정답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면? 혹은 1,2,3,4를 적절하게 섞은 어중간한 답이 오히려 기존의 답안지보다 명쾌하게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된다라면? 자판기의 700원짜리 코코팜을 하나를 선택해서 친구를 줄까, 내가 먹을까 고민하는 것보다 350원짜리 캔커피를 사서 둘이 사이좋게 먹는게 훨씬 좋았다면? 그렇다면 어떨까?
비단 심리테스트의 선택지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모든 것들의 경계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문학에선 이미 세계적으로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장르소설 작가가 순수문학 부분에서 인정을 받고 수상을 받는가 하면, 순수문학 작가가 장르소설을 쓰겠다고 천명하는 사례들 역시 늘어나는 추세이다. 문학이 영화화되고, 영화가 소설화되고, 문학과 영화산업의 경계 또한 계속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정치에선 좌익과 우익의 구분이 애매한 계급적 평등을 요구하면서도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정치노선을 펼치는 세력들이 늘어나고 있고, 새로운 정치집단인 기든스가 제시한 제3의길의 입장을 옹호하는 정치세력도 늘어나고 있다. 각 개인들 조차도 입양을 옹호하는 좌익성향이면서도 지독한 민족주의자 같은 우익스러운 입장을 가지고 있는 모호한 개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IT 분야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시도되는 컨버젼스로 서로 다른 시장이라고 여겨졌던 휴대용 영상기기 시장과 휴대용 음악감상기기 시장이 PMP와 MP3의 결합으로 무너졌고, 디카와 MP3,PMP 기능을 합쳐놓은 삼성의 #11이 출시되었고, 휴대폰에 카메라와 MP3기능은 필수요, PMP기능까지 탑재한 스카이 IMP-U100, 네비게이션과 DMB를 컨버젼스한 제품등. 속속들이 각 기술들이 서로 결합하며 각자의 시장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음악 역시 장르들의 경계가 무너졌다. 재즈와 힙합이 현진영을 통해 만났고, 힙합과 락이 린킨파크를 통해 만났다. 모던락과 하드락이 만났고, 댄스와 발라드가 만났고, R&B와 힙합이 만났고, 팝과 오페라가 만났고, 클래식과 힙합이 만났고. 모든 것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모호해지며 그러한 퓨전장르들이 분명한 인기를 끌고,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게임 분야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 게임의 경계가 무너지고, 비디오게임과 모바일 시장이 서로 합작을 맺기도 하고, 토종 게임 기업과 글로벌 게임 기업이 손을 잡고, 전혀 다른 작품들이 한꺼번에 모여 진정한 로망을 이룬 <슈퍼 로봇 대전>이라는 시리즈 게임이 발매할때마다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개그 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다. KBS 개그콘서트에서 웃찾사의 유행어를 패러디하고 웃찾사 역시 개그 콘서트 출신의 개그맨이 과거 개콘에서 했던 개그를 하며 시청자들을 웃기고 있다.
이전에 박쥐라고 놀림을 받던 회색분자들이 인기를 얻는 세상. 확고한 입장 표명이 당당하고 멋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호성이 주목을 받고 있다.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상한 회색분자로 취급받던 개인주의의 모호성이 존중받을만한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모호성은 이제 비겁함이 아니라 현실이다.’
모든 것을 구분하고 끊임없이 해체해 들어가며 자신들만의 선택지를 탄탄하게 구축하던 수많은 집단-혹은 장르-에 의해 규정되고 구분지어지던 시대는 끝났다. 인간은 각자 개인의 개성을 마음껏 표출하며 모든 선택지들을 혼합하고 뒤집으며 자신만의 고유한 개인화로 만들어버린다. 불변할 것만 같았던 작품들은 패러디되고 2차적 창작물의 자원이 된다. 곧 시작될 Web 2.0 서비스같은 것으로 모든 콘텐츠는 개인화되고, 모든 회사들은 유저의 손아귀 아래로 떨어져 선택당해지는 운명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섞이고 혼재되어가고 해체되어 재구축되는 카오스에서 독단적인 선택지는 살아남기 힘들다. 전사회적, 전세계적인 분야에서 무수한 경계허물기가 점점 가속도를 붙여가는 요즈음, 수많은 자판기의 버튼 앞에서 한가지만을 누르는 사람은 완전 바보가 되어버린다.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버튼을 섞어서 나만의 버튼으로 만들어 누르는 것. 그렇게 독특하게 개인화된 사람들이 주목을 받고, 인기를 끌고 있다.
자, 이제 당신은 선택해야한다. (앞에서 선택이라는 것을 잔뜩 해체해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지만) 경계허물기가 범람하는 이 세대에서 똥고집을 피워가며 한가지 주장과 일관성에 나를 규격화시키고 그러한 관에 나의 몸을 맞출 것인가. 그 관을 깨부수고 차라리 다른 수많은 선택지에서 따온 재료를 가지고 나의 입맛에 맞게 철저한 개인주의의 모호성으로 무장한, 그러나 특별하게 유니크한 내게 맞는 관을 만들 것인가.
진정한 탈규격화와 개인화가 진행된 사람이라면 이 두가지 선택을 또 적절하게 섞어서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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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6/07 20:21 | 기억이핥은흔적(군대)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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